이중섭 전시관에는 은지화작품이 있는데...

 

아마도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중섭에게는 회화도구를 구입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망을 담배 속지에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자료를 살펴보니..

 

부산 피난시절에 

" 한국전쟁당시 부산 피난시절 부두 막노동 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 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 나무위키 자료

 

생활고와 와병으로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이 생겨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였다." - 나무위키 자료

외로운 죽음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정신병,거식증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동묘지에 있다." - 나무위키 자료

 

 

 

 

"이중섭이 언제부터 은지화를 그렸는지에 대한 의견은 주변인의 회고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952년 6월 가족을 일본에 떠나보낸 이후 시작해 1955년 열린 <이중섭 작품전 미도파백화점 화랑 1.18~1.27>까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섭은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검정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다. 그 결과 은박지 종이의 광택과 음각 선에 묻혀들어간 짙은 선이 흡사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작품 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 참여한 첫 출판미술은 1946년 원산문학가 동맹 기관지 [응향]의 표지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고, 1947년 오장환의 두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설화에 빗대어 그렸다. 1952년에는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화 밑그림을 제작하고, 이후 [자유예술]과 [문학예술] 등에 다수의 삽화를 남겼다. <새>는 1957년 9월호 [자유문학]표지로 쓰였다. " - 미술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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