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회화/가족을 보고...

당시의 사회가  유교에서 부터 이어져 온 남성 권위주의 사회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들은 누구에게나 있었겠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은 드물고,  무심한 표현들이  뭇 남성들의 모습이었다면 ....

 

그와는 달리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에게 가족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존재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설명글을 보니 "가족과의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했다" 라고..

적혀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결혼후에 공산치하에서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 자료 나무위키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6.25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 자료 나무위키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 자료 나무위키

 

제주도에서 ..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가족과의 이별...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의 부고를 접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이후에..

여러 노력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만나지 못한 가족들..

이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의 손을 놓고 싶지않은 마음을  서로  맞잡은 손과 이어진 끈으로 표현한 것 같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작품들이..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생각나게 한다.. 

 

 

 

 

" 이중섭은 1950년 12월 피란 생활을 시작하며, 어머니와 이별하고, 1952년 6월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은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중섭은 네 사람이 서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모습,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신, 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 등을 그리며 가족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 미술관 설명

 

 

 

 

 

 

 

" 이중섭이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원산의 한 고아원에서 미술 교사일을 잠시 했을 때,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서로가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들 사이에 게와 물고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1949년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망월>에 새를 등장시킨 이래 1950년까지 새 또는 닭을 즐겨 그렸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내는 동안 닭을 직접 기르면서 관찰하고,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두 마리의 닭을 부부로 의인화하거나, 새와 인간을 동등한 크기로 두어 가족 구성원으로 엮어내는 한편, 때로는 화면의 대각선으로 닭을 배치해 역동적인 형세로 표현해냈다" - 미술관 설명

 

 

"소는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뜻하는 상징이었다. 1940년대 초반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여러 작품에서도 소의 도상이 등장하고, 1940년 후반 원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유채로 그린 대표작들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 그려졌다" - 미술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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