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있는 본태 박물관에 방문을 했는데..

노출콘크리트의 건축물의 대가 안도다다오가 설계했다는 본태박물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쌓인 길과 외관을 둘러보니 나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찍는 곳마다 작품...

건물은 기억자로 두개를 배열하고, 다시 기억자의 끝과 끝을 연결하여 삼각형을 만들고, 그곳에 다양한 공간들을 만들어냈다..

 

안도다다오 건축물의 특징중 하나인 크지만 얕은 큰 연못은 조용한 가운데 정적인 안전감을 주었고,

전시를 보고 나오면 이와는 달리...  

이 연못의 한쪽면을 접하고 있는 지하에서 1층으로 오르는 긴 오르막길의 긴 옆은 이 연못에서 넘쳐흐르는 물로 인한  맑은물소리와 굽이굽이 내려오는 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또 지하에서 1층으로 오르면서 내 눈높이에서 보이는 연못의 표면과 지면의 모습들....

땅과 물이 하나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상상력과 의도를 알 수 있게 했다.

 

앞으로 건축을 하려면 이런 다양한 모습을 반영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적인 박물관에 담긴 부조화한 전통유물들 그리고 다양한 미술작품들의 모습속에서도

콘크리트가 주는 차갑고 무채색의 면들에  배치된 형형색색의 작품은 생생함이 잘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뭐처럼 천천히 걸으며,  쉼을 얻고, 새로움을 보고가는 제주도에있는 좋은 여행 방문지였다.

 

 

 

 

2023년 여름에 방문한 "아르떼 뮤지엄" 제주에서 진행했던 빛의 축제는 

눈 앞에서 그림으로만 보았던 작품들이...

큰 벽에 동영상으로 다가왔을 때...

살아움직이는 그림으로 보았을 때...

 

실제의 그림이 주는 감동을 뛰어넘어서 그림과 관람자가 하나된 느낌!!!.

살아서 움직이는 그림을 통하여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작가의 손길도 쉽게 느낄 수 있었고..

공간 전체를 감싸는 그림속의 화려한 색감속에 파묻혔을 때 느끼는 황홀감!!!

 

"미디어 아트"에서의 작품 관람은 미술관에서의 감동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란...

이런 것이다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르떼 뮤지엄"은 원래 커다란 "물류창고"를 "아트 갤러리"로 변경한 듯 옆면을 자세히 보면...

화물하역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막아놓았지만..

 

"아르떼뮤지엄 제주는 2020년 9월말 제주 애월에서 선보인 첫 번째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입니다. 

과거 스피커제조공장으로 사용되던 바닥면적 1,400평, 최대10m높이에 육박하는 웅장한 공간을 업사이클링하여

섬(Island)를 컨셉으로 빛과 소리로 만들어진 11개의 다채로운 미디어아트 전시가 펼쳐집니다." - 홈페이지 설명

 

"영원한 자연(Eternal Nature)을 주제로 제작된 작품들은 시각적 강렬함과 더불어 감각적인 사운드 및 품격있는

향기와 함께 완벽한 몰입 경험을 제공합니다." - 홈페이지 설명

 

 

 

 

 

 

장소 :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다원공간 및 중층공간

기간 : 2023. 2. 3 ~ 5.14

 

"페터 바이벨(1944 ~2023)은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생으로 어린시절 오스트리아 내 미군캠프에서 난민생활을 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면서 빈 대학교에서 의학과 수리논리학을 수학하며, 확장영화와 사진작업을 시작했다.

 

바이벨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미디어 매체와 전자기기에 대한 작업을 선보였으며..

198년대에는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활동에 매진했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자문위원을 거쳐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기획자, 베니스 비엔날레 오스트리아관 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9년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 센터(ZKM)의 센터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작가는 미디어 개념 미술가, 이론가, 기획자, 교육자로 꾸준하게 활동하며 미디어아트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 전시 리플릿 내용.

 

 

처음 들어보는 인지행위로서의 예술이란 ..

살펴보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의해 보면  "같은 실상, 인물등을 다양하게 변화시켜서  대비된 실상과 인물이 어떻게 인지되는지 생각하게하는 행위예술"이다....

 

예를 들어서 "여자로서의 자화상" 작품을 보면 자신의 얼굴여성의 눈을 글로즈업한 사진을 크게 찍어서 자신의 눈에 붙여서 사진을 찍고, 또 여성의 입을 확대해서 사진을 찍은후 자신의 입에 붙이므로, 다른 성별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즉, 자신의 존재에 여성의 이미지를 붙임으로 여성으로서의 자화성을 그린 것이다..

 

 

"페터바이벨 인지행위로서의 예술"은 미디어 개념미술작가로 알려진 페터 바이벨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시이다. 페터바이벨은 1960년대부터 예술가이자 큐레이터, 이론가로 활동하며 미디어 아트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작품 70여점을 예술행동, 퍼포먼스, 사진, 언어분석, 글쓰기, 시, 비디오, 확장영화, 컴퓨터 기반 설치작업 등의 주제로 살펴본다" - 전시 리플릿 내용.

 

"페터 바이벨의 작품들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을 거치며 정치, 사회현상에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냈으며, 당시 예술에 대한 관습적 견해에 도전했다.

 

 

 

 

작가는 1960년대 미디어 발전초창기에 언어이론, 수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장했고, 더 나아가 실험문학에서 퍼포먼스, 해체주의와 실험영화 등의 주제도 다루었다. 바이벨은 작업초기부터 타자기, 음반, 마그네토폰, 사진, 영화, 비디오 등 기계장치에 기반한 예술의 전 영역을 실험하며 이미지와 실재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질문을 던져왔다." 

 

 

 

"1966년을 기점으로 바이벨은 자신의 작품에 인터랙티브 요소를 포함시키며 더욱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과 참여를 제안했다." -

 

 

"이번 전시는 2019년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 센터(ZKM)에서 개최했던 동명의 전시를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과 ZKM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며 인류의 변화와 사회 현상을 목격하며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구축한 페터 바이벨의 이번 전시가 관람객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대한 깊은 성찰의 순간을 제공하길 바란다." - 전시 리플릿 내용

 

 

 

 

 

이중섭 전시관에는 은지화작품이 있는데...

 

아마도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중섭에게는 회화도구를 구입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망을 담배 속지에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자료를 살펴보니..

 

부산 피난시절에 

" 한국전쟁당시 부산 피난시절 부두 막노동 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 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 나무위키 자료

 

생활고와 와병으로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이 생겨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였다." - 나무위키 자료

외로운 죽음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정신병,거식증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동묘지에 있다." - 나무위키 자료

 

 

 

 

"이중섭이 언제부터 은지화를 그렸는지에 대한 의견은 주변인의 회고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952년 6월 가족을 일본에 떠나보낸 이후 시작해 1955년 열린 <이중섭 작품전 미도파백화점 화랑 1.18~1.27>까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섭은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검정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다. 그 결과 은박지 종이의 광택과 음각 선에 묻혀들어간 짙은 선이 흡사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작품 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 참여한 첫 출판미술은 1946년 원산문학가 동맹 기관지 [응향]의 표지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고, 1947년 오장환의 두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설화에 빗대어 그렸다. 1952년에는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화 밑그림을 제작하고, 이후 [자유예술]과 [문학예술] 등에 다수의 삽화를 남겼다. <새>는 1957년 9월호 [자유문학]표지로 쓰였다. "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의 회화/가족을 보고...

당시의 사회가  유교에서 부터 이어져 온 남성 권위주의 사회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들은 누구에게나 있었겠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은 드물고,  무심한 표현들이  뭇 남성들의 모습이었다면 ....

 

그와는 달리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에게 가족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존재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설명글을 보니 "가족과의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했다" 라고..

적혀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결혼후에 공산치하에서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 자료 나무위키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6.25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 자료 나무위키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 자료 나무위키

 

제주도에서 ..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가족과의 이별...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의 부고를 접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이후에..

여러 노력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만나지 못한 가족들..

이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의 손을 놓고 싶지않은 마음을  서로  맞잡은 손과 이어진 끈으로 표현한 것 같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작품들이..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생각나게 한다.. 

 

 

 

 

" 이중섭은 1950년 12월 피란 생활을 시작하며, 어머니와 이별하고, 1952년 6월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은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중섭은 네 사람이 서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모습,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신, 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 등을 그리며 가족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 미술관 설명

 

 

 

 

 

 

 

" 이중섭이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원산의 한 고아원에서 미술 교사일을 잠시 했을 때,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서로가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들 사이에 게와 물고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1949년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망월>에 새를 등장시킨 이래 1950년까지 새 또는 닭을 즐겨 그렸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내는 동안 닭을 직접 기르면서 관찰하고,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두 마리의 닭을 부부로 의인화하거나, 새와 인간을 동등한 크기로 두어 가족 구성원으로 엮어내는 한편, 때로는 화면의 대각선으로 닭을 배치해 역동적인 형세로 표현해냈다" - 미술관 설명

 

 

"소는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뜻하는 상징이었다. 1940년대 초반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여러 작품에서도 소의 도상이 등장하고, 1940년 후반 원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유채로 그린 대표작들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 그려졌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1940년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림의 열정을 놓지않고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동화같은 작품으로 그려내어 우리들의 마음을 설래이게 하였고, 1950년대 비참했던 한국전쟁속에서도  그림의 열정을 놓지않았고 우직한 '소'를 그려내어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품을 남긴  최고의 화가이자, 국민들이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므로...

 

4월이지만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 이중섭에 다녀왔다.

 

이번 특별전은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님의 유족께서 기증한 미술작품 총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 90여점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10점  총 100여점으로 구성한 전시라고 한다.

 

이중 먼저 가장 많은 작품을 선보인 엽서화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엽서화작품 1940년~1943년까지 4년간의 작품이라고 하며..

특히 이 작품들은 도쿄 문화학원에서 만나 연인이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다수의 엽서(9x14cm)에 그린 작품들이고, 

이후 이중섭은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하였고,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엽서화를 보고 느낀점은!!!

소박한 작은 크기의 엽서에  인물, 동물, 생물 그리고 기하적인 이미지단순하게 그린 점인상적이었고, 단순한 색조이지만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 모든 요소가 이중섭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

어떤 엽서화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동화와 같은 순수함을...

어떤 엽서화는 인물의 자유로운 동작의 이미지를 통해서 자유함을..

어떤 엽서화는  서양의 신화속의  동물들의 이미지를 넣은 듯한 서양화다움을...

그리고 어떤 엽서화는 동양화를 단순한 색깔과  재미있는 인물로 새로운 동양화를 느끼게 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천재 화가의 생각을 '엽서화'라는 작은 크기의 화폭다양한 정서를 담은 소박함이 좋았다 ...

 

ㅕㅂ

 

 

"이중섭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문화학원에 입학하고, 1939년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처음 만났다. 그는 후일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다수의 엽서를 보냈는데....9 x 14cm의 관제엽서 앞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는 주소를 남겼다.현재까지 남아있는 엽서화는 총 88점이며,이를 연도별로 구분하면 1940년 1점, 1941년에 75점, 1942년 9점 1943년에 보낸 것이 3점이다.이 그림들은 1979년 열린 <이중섭작품전> 미도파백화점 화랑 4.15~5.15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일본 유학시절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등과 함께 활동하던 자유미술가협회의 추상 및 초 현실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 미술관내 소개글

 

 

 

 

국립경주박물관내의 특별전시관에서 전시중인 낭산..

 

경주의 '낭산'을 처음 들어서 어떤 전시인가 궁금했는데...

방문해 보니 경주의 중심에 있는 작은 산인  '낭산'에는 선덕여왕릉과 많은 왕릉과 사찰이 존재함을 보고 경주의 중심에 위치한 이곳은 성스러운 산으로서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활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세월에 남은 유적들은 오직 왕릉, 사찰 터와 이곳에 남아있는 탑과 불상과 같은 석재 유물들.. 

이 유물들을 통해서 선조들의 생생했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낭산으로의 초대> - 정리

 

"코로나로 힘든 이 시국에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주의 낭산이 신라인들에게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누구는 나당전쟁같은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누구는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낭산을 찾았습니다.

다른 누구는 낭산을 찾아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신라인들은 힘든 일이 있으면 낭산을 찾았습니다.

 

낭산은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어서 '이리' 낭(狼)자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마천은 '사기'에서 동쪽의 큰 별을 '낭'으로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리 형상 때문이 아니라 신라 왕궁의 동(남)쪽에 자리한 까닭에 낭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낭산은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 이름의 유래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번 전시가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낭산을 이해하는 디딤돌이 되길 바랍니다. "

 

 

<낭산의 유적>

1. 선덕여왕릉(사적)

2. 낭산고분군

3. 사천왕사 터(사적)

4. 망덕사터(사적) 망덕사터 당간지주(보물)

5. 전 신문왕릉(사적)

6. 능지탑터

7. 낭산 마애보살 삼존좌상(보물)

8. 독서당(최치원 고택의 터)

9. 구황동 목탑 터

10. 전 황복사 터(삼층석탑(국보)/금제열래좌상(국보)/금제여래입상(국보)

11. 미완성 통일 신라 무덤 석물

12. 전 진평왕릉(사적)

 

 

현재의 위치 "국립경주박물관"

 

 

 

 

경주는 서라벌이라고도  불리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년간 지속된 신라의 왕경(王京)이 자리했던 곳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신라의 최고 중심지로서 신라의 흥망과 맥을 같이 하였습니다..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년 신라의 유산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박물관 입니다.  1945년 국립박물관으로 출발하여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역사유적지구"내에 위치하고 있고, 인근에는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과 월지", 신라의 능이 밀집된 "대릉원"과 대릉원내의 "천마총" , 신라의 큰절 "황용사터"와 세계최초의 천문관측소 "첨성대"가 이웃하고 있고,  또 최근에 경주관광의 핫플레이스로 경주시 황남동의 골목길인 "황리단길"도 이웃하여 트랜디한 카페, 식당등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젊은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박물관의 구성>

1.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2. 신라역사관 - 구석기시대부터 찬란한 신라의 유산,유물전시

3. 신라미술관 - 신라의 찬란한 불교문화미술품외 전시 (22.8월 현재는 공사중)

4. 월지관- 경주동궁과 월지출토품 및 미니어처

5. 특별전시관 - "낭산 도리천가는길"  22.6.15~9.12까지 전시

6. 어린이 박물관 - 신라문화유산을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신라체험 

7. 신라천년보고 - 개방형 전시형 수장고

8. 수묵당

 

22년 무더운 여름에 다시찾은 "국립경주박물관"

아주 어렸을 때 보았지만 다시 본 신라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유물과 유품, 유적을 보고,  1500년전의 우리나라의 문화가 이렇게까지 찬란하고  화려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같이 출토된 세계의 다양한 유물을 보고, 당시 유교를 숭배하고 타 세계에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와 대비되어, 당시 지도층의 다양한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인 포용력과 담대함 그리고 예견력이  천년왕조로 이어지게 했고, 후대가 보기에도  놀랍도록 섬세하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생각에....

 

이를 바라보는 우리 후손들도 눈 앞의 어지러운 세상만 바라보기보다는...

더 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본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너무나  놀랍도록 경외로웠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경주엑스포대공원내의 "경주타워" 전망대에서 본 동영상을 통해서  경주 천년 왕경이 2019년 12월 "신라왕경  특별법" 이 제정되어 정부의 지원으로 일부 유적들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는데....

 

과거의 모습이 당시 그대로 생생하게  복원됨으로 세계적인 유산으로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지길 기원해 봅니다..

 

21년 겨울에 예매를 해두고, 전시 마지막날인 22년 5월 8일(일)에 방문하였고,  이제서야 올리게 됩니다..

 

'빛' 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한 것인데...

처음에는 '빛'이라는 주제로 인하여 제주도에서 미디어 아트로 유명작가의 그림을 영사기를 통하여

빛으로 투영하여 환상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전시회가 인기를 끈다고 하여서...

비슷한 미디어아트라고 생각했는데...

빛을 주제로 한  과거의 종교적 색채의 웅장한 그림, 현대의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 모네의 그림을 통한 빛의 연구 등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좋은 공부가 되었다.

 

미술관에서 선정한 주제만 나열해 보면 "빛, 신의 창조물",  "빛 연구의 대", "릴리안 린 빛의 물리학을 구현하다", "빛의 인상", "장엄한 빛", "진실된 빛", "브루스 나우먼 빛을 가두다", "빛과 우주", "데이비드 바첼러 런던 거리를 비추다", "실내의 빛", "빛의 흔적", 브리짓 라이리 바실리 칸딘스키 빛의 색채", "리즈로즈 빛과 소리로 음악을 만들다", "스티븐 윌라츠 빛을 움직이다", "제임스 터렐 빛으로 숭고함을 경험하다", "빛 인간의 창조물"  총 16개의 주제에 맞는 작품들을 빼곡히 진열해 놓았다..

 

 

북서울시립 미술관을 방문해보니...

"빛 -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은"은 서울시립미술관과 테이트 미술관이 공동기획한 전시로,

지난 200년간 빛을 탐구해온 예술가 43명의 작품을 통해서 그림속에 투영된 빛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는 좋은 전시회 이었다.

 

작가들은 18세기 영국부터 오늘날 전세계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시대와 매체를 아우르는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워 넣었다.

 

안내 책자를 살펴보니....

"빛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인지의 역사다.

수세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류가 빛을 이해하는 방식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빛은 여전히 우리의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는 매력적인 대상이다.

 

먼저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빛의 잠재성에 매혹된 많은 예술가들이 회화와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를 넘나들며 혁신적인 기법을 개발하고,  지속적인 도전을 해왔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니쉬카푸어 등 종교적 의미의 빛을 탐구한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근현대 물리학의 빛에 몰두한 윌리엄 터너와 릴리안 린과 같은 예술가도 존재한다.

클로드 모네와 인상주의, 라슬로 모호이너지와 바우하우스처럼 때로는 빛의 속성을 파헤치기 위해 모여든 예술가들이 하나의 예술 사조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아가 올라퍼 엘리아슨과 제임스 터렐등 현대 예술가들은 빛 그 자체를 재료로 활용하면서 예술의 유형을 확장했다.

 

빛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지만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동안 미술사를 이끌어온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빛은 언제나 아름다우며, 붙잡아보고 싶은 흥미로운 주제로 여겨져 왔다. "

 

아니쉬 카푸어 <이쉬의 빛>2003

 

윌리엄 블레이크 <아담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1795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그림자와 어둠 - 대홍수의 저녁> 1843년

 

릴리안 린 <액체의 반사> 1968

 

클로드 모네 <포흐빌레의 센강> 1894

 

 

 

존 브렛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 1871

 

 

존 마틴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음의 파괴 1822, 2011년 복원

 

존 컨스터블 <둑에 소년이 앉아 있는 햄스테드 히스의 브랜치 힐 연못> 1825

 

 

올라퍼 엘리아슨 <우주 먼지입자> 2014

 

브리스 나우먼 <거울과 하얀등이 있는 통로> 1971

 

주제 빛을 가두다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에 상호업무협조를 위해 처음 가보았는데..

 

주차장에서 본관으로 들어서니 지하1층에서  7층까지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복도형 갤러리를 보고 놀랐다...

운정그린캠퍼스가 준공된지도 2011년 4월 준공헌정식을 가졌다고하니 이제 11년째... 

들어보니 운정그린캠퍼스에는 수많은 미국·중국 등 외국 대학 관계자들, 국내외 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고,  이들은 한결같이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의 아름다움과 최신 시설에 감탄을 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이곳에 훌륭한 갤러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분...

그래서 수유시장의 블로그에 담았다...

‘예술·문화, 그린’을 품은 캠퍼스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의 주목할 점은 4개동의 건물이 따로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어서 건물 간 이동이 용이하고 공간의 상호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쩐지 평소 일반적인 대학에서는 각 전공분야별로 공간이 분리되어있어서 야외공간으로 이동하는 학생들을  많이 보아왔던 터라....

운정그린캠퍼스의 야외공간에는 학생들이 보이지않아서 조끔 썰렁했는데 알고보니 실내로 이동하니 학생들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없었다..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의 설계자는 김석철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 대표라고 한다.

김석철대표께서  설계한 주요 건축물은 "예술의 전당", "서울 오페라하우스", "제주 영화박물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라고 하며, 문화예술건축물분야에서 국내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있는 건축가라고 한다..

다시 돌아가면...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에서 눈을 사로잡는 것은 나선형 아트갤러리는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을 연상시킨다고 하며,  갤러리는 본관 전 층을 관통하는 갤러리로 즉 1층부터 7층까지 27개의 오목한 전시공간과  벽면에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이에 따라 층간 이동을 하면서 동시에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으며, 작품들은 성신여대 교수, 학생, 동문 등이 기증했다고 하며, 서양화, 한국화, 조각 분야 원로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또 나선형갤러리에서 아래로 눈을 돌리면 바로 볼 수 있는 지하 로비 정중앙에는  피아노가 설치되어있어서  방문당시에는 누군가 연주를 하면 7층까지 나선형 갤러리에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채워져서 운치있겠다라고 생각했다는데.....

이 피아노는 무인 피아노라고 한다.... 하루종일 연주가 가능하니 그 아이디어에 놀랄 뿐.....

 

 

 

 

하도 독특한 갤러리라 기사를 찾아보니 한국대학신문에 기고된 2015년 당시의 심화진 총장님의 인터뷰를 보니...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은 “운정그린캠퍼스 준공 5년만에 ‘문화예술 캠퍼스’의 꿈이 1차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미래의 사회적 리더들을 육성하는 대학 캠퍼스 안으로 명망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들여옴으로써 일상적인 전시를 뛰어넘는 독창적 문화예술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심 총장은 또 “이번 프로젝트로 초대작가들은 본인 작품의 지속적 전시·관리·홍보의 기회를, 학생들은 질 높은 문화예술 작품 향유의 기회를 얻었다”며 “사회적으로도 미술대중화의 혁신적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대학캠퍼스의 깊숙한 곳까지 갤러리를 끌어들여..

강의실, 복도, 캠퍼스 내외의 공간을 갤러리로 만들고,

여기에 세계의 유수한 작품을 전시하여서,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손쉽게 작품을 보며 공부하는 성신여대 학생들 ...

앞으로 미술계와 다양한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루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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