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동행축제에 네이버 동네시장장보기도 참여합니다.

 

행사기간은  23. 5. 9 ~ 5.15  7일간이며,

1만원이상 구매시 선착순 배송할인쿠폰 3천원을 증정합니다. 

 

많이 이용해주세요!!!

전통시장 온라인 장보기 배달서비스 "놀장"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원으로 23년 5월 농할 행사로 30% 할인를 진행합니다.

 

농할행사는 국민의 가계 물가 부담을 완화하여

신선 농축산물에 대해 일정기간 할인 지원을 하는 행사입니다.

할인 한도

할인행사 별 1인당 1주 2만원이며,

할인 품목국내산 농축산물

즉, 배추, 무, 사과, 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계란, 밤, 대추,

양파, 깐마늘, 상추, 청양고추, 딸기, 감자, 시금치, 당근, 애호박 등 입니다.

 

놀장에서 "농할"로 표기된 상품은 30%의 할인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행사기간23년 5월9일 ~5월12일까지 단4일만 하오니

많이 찾아주세요~~

 

 

 

2023년 전통시장 상반기 온라인 특별할인전을 진행합니다.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 - 수유전통시장에서 구매하시면 30%를 할인해드립니다. 

 

▶ 행사기간 : 2023. 5. 15 ~ 5. 31(조기에 종료될 수 있습니다)

▶ 행사내용 : 네이버 동네시장 장보기 수유전통시장에서 상품구매시 구매금액의 30%할인 

▶ 행사범위 : 전체 720상품30%할인 

▶ 배달안내

 

배달지역 : 서울시, 의정부시 (배달불가 : 강서구,관악구,금천구,양천구)

배달시간

  • 오후 1시까지 주문 시 당일 오후 4시 ~ 7시 배달
  • 일/공휴일 (다음날 오후 4시 ~ 7시 배달)

배달비용 : 3,500원 (5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전 720가지 전체 상품을 30%할인하여 판매합니다.

 

수유시장에서는 중기벤처기업부중소기업유통센터에서 주관하고,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지원하는 2023 동행축제 특별전 프로모션을 진행합니다.

 

쿠팡이츠 할인  쿠폰행사


행사기간 : 2023.05.09 ~2023.05.15 (조기에 종료될 수도 있습니다)

행사내용 : 쿠팡이츠에서  10,000원 이상 구매 시 3,000원 배달 쿠폰 즉시 지급

특이사항  :
   - 본 프로모션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쿠팡이츠의 단독 계약으로 상인회와는 무관한 점 안내드립니다.
   - 쿠폰은 일일 현황에 따라서 조기 마감될 수 있습니다.
   - 고객은 하루에 1개 쿠폰을 사용할 수 있으며 선착순입니다.

 

조기에 마감할 수 있으니 서두르세요!!!!

수유시장에서는 우리시장에서만의 특화상품

밀키트를 개발하였습니다..

브랜드명은 "당당한셰프"로 하고 상표권을 등록하였습니다.

 

"당당한셰프"로 브랜드명을 명명한 이유는

1. 수유시장 상인 모두가 "당당한셰프" 라는 자부심을 불어넣고,

2. 구매하시고, 요리하시는 고객분들도 "당당한셰프"임을 주변에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당당한셰프"에서 출시한  "불고기낙지 전골"

한국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중에 하나인  불고기전골에 낙지 한마리를 넣었습니다.

 

전통의 맛에 품격을 살리기 위해서... 

불고기의 감칠맛낙지 한마리가 그대로 풍미를 살린 불낙전골..

밀키트로 간편하게 조리하고,  시원하게 드실 수 있습니다....

 

<특징>

1. 수유시장에 판매되는 불고기와 낙지를 납품받아서 만들어서 신선합니다.

2. 전통시장에서만 느낄수 있는 후한 인심으로  야채와 고기의 양도 풍성하게 담았습니다. 

그결과  양도 2인분이라고 표기되어있지만  3~4명이 식사하셔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3.  가격은 25,000원이며, 롯데택배를 통해서 전국 배송이 가능합니다.

 

카카오"메이커스"네이버 "스마트스토아"를 통해서도 손쉽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찾아주세요~~

 

불고기낙지전골 (1팩2인분)으로 끓이는 모습

1팩에 2인분이라고 명기되었지만 실제로는 3~4명이 식사하실 수 있도록 넉넉하게 담았습니다..

 

 

밀키트 1팩

 

 

 

낙지 넣기전

 

낙지 한마리 투하

낙지를 오래끓이면 질겨지므로 맨 나중에 넣으셔야 합니다..

 

 

오프라인매장 :

서울시 강북구 도봉로67길 18 (수유동, 수유시장)  수유시장 1층 45~46호

전화문의 : 02-989-4730

 

 

온라인매장  :

1. 전통시장 장보기 앱 "놀장" - 수유시장반경  2Km이내 고객

2. 쿠팡이츠 - 수유시장 반경 4Km이내 고객

3. 네이버장보기 - 서울시, 의정부시 고객 (단, 금천구, 강서구, 관악구, 양천구 제외)

 

전국배송 : 

네이버스마트 스토어 주문하기 

 

당당한셰프 : 네이버쇼핑 스마트스토어

수유시장에서 만드는 특산품, 밀키트

smartstore.naver.com

톡스토아 주문하기

 

카카오톡 스토어 당당한셰프

당당한셰프에서 다양한 상품을 둘러보세요!

store.kakao.com

 

2021년쯤에 오픈한 것으로 보이는  "문지리 535" 카페는

카페명지번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문지리 535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자유로와 접하고 있는 "문지리535 카페"를 방문해보니 ...

경기도 파주에 위치하고 있는 카페로  다양한 종류의 빵과 커피 및 음료 그리고 디저트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통통한 새우가 들어간 새우 크로아상 샌드위치, 샐러드가 듬북 들어간 치킨시저 샌드위치, 그외에 달콤한 빵들과 고소한 맛이 일품인 흑임자크림커피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카페 내부널찍한 공간으로 수많은 좌석으로 채워져있고, 앞에는 탁 트인  평지뷰를 자랑하며, 뒷에는 식물원처럼 온 통 아열대식물들로 가득채웠고, 천장의 반을 투광창으로 밝고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또 단체석 및  80대의 대형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방문한 당시에는 기존의 주차장이 만차라.. 추가로 옆의 평지를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평소 약 200대 정도의 주차 가능할 것 보입니다..

 

"문지리 535"의 매장규모를 살펴보니 대지면적이 4,777㎥ (1448평)건축면적이 1,907.08㎥(578평)위에

연면적이 2,664.79㎥(808평)으로 지하1~지상2층으로 건축했네요..

 

식물원 카페는 양주와 파주의 경계에 있는 양주  "오랑주리" 카페와 지붕양식이 똑같아서...

같은 분이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아니면 참고했겠지요...

 

규모면에서는 양주 오랑주리도 약 1400평에 560평으로 건축했느니  거의 동일한 규모였지만..

자유로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므로 접근성이 훨씬 좋아서  양주 "오랑주리"보다 더 많은 고객들로 넘쳐났고....

다양한 빵과 샌드위치 그리고 간단한 샐러드와 음식으로 특화시킨 먹거리 상품들로  매출도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만들어진지 이제 3년차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이미 대박이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아가시길...

 

 

 

 

 

 

장소 :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다원공간 및 중층공간

기간 : 2023. 2. 3 ~ 5.14

 

"페터 바이벨(1944 ~2023)은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생으로 어린시절 오스트리아 내 미군캠프에서 난민생활을 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면서 빈 대학교에서 의학과 수리논리학을 수학하며, 확장영화와 사진작업을 시작했다.

 

바이벨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미디어 매체와 전자기기에 대한 작업을 선보였으며..

198년대에는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활동에 매진했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자문위원을 거쳐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기획자, 베니스 비엔날레 오스트리아관 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9년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 센터(ZKM)의 센터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작가는 미디어 개념 미술가, 이론가, 기획자, 교육자로 꾸준하게 활동하며 미디어아트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 전시 리플릿 내용.

 

 

처음 들어보는 인지행위로서의 예술이란 ..

살펴보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의해 보면  "같은 실상, 인물등을 다양하게 변화시켜서  대비된 실상과 인물이 어떻게 인지되는지 생각하게하는 행위예술"이다....

 

예를 들어서 "여자로서의 자화상" 작품을 보면 자신의 얼굴여성의 눈을 글로즈업한 사진을 크게 찍어서 자신의 눈에 붙여서 사진을 찍고, 또 여성의 입을 확대해서 사진을 찍은후 자신의 입에 붙이므로, 다른 성별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즉, 자신의 존재에 여성의 이미지를 붙임으로 여성으로서의 자화성을 그린 것이다..

 

 

"페터바이벨 인지행위로서의 예술"은 미디어 개념미술작가로 알려진 페터 바이벨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시이다. 페터바이벨은 1960년대부터 예술가이자 큐레이터, 이론가로 활동하며 미디어 아트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대표하는 작품 70여점을 예술행동, 퍼포먼스, 사진, 언어분석, 글쓰기, 시, 비디오, 확장영화, 컴퓨터 기반 설치작업 등의 주제로 살펴본다" - 전시 리플릿 내용.

 

"페터 바이벨의 작품들은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을 거치며 정치, 사회현상에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냈으며, 당시 예술에 대한 관습적 견해에 도전했다.

 

 

 

 

작가는 1960년대 미디어 발전초창기에 언어이론, 수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확장했고, 더 나아가 실험문학에서 퍼포먼스, 해체주의와 실험영화 등의 주제도 다루었다. 바이벨은 작업초기부터 타자기, 음반, 마그네토폰, 사진, 영화, 비디오 등 기계장치에 기반한 예술의 전 영역을 실험하며 이미지와 실재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질문을 던져왔다." 

 

 

 

"1966년을 기점으로 바이벨은 자신의 작품에 인터랙티브 요소를 포함시키며 더욱 적극적으로 관객과의 소통과 참여를 제안했다." -

 

 

"이번 전시는 2019년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 센터(ZKM)에서 개최했던 동명의 전시를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과 ZKM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며 인류의 변화와 사회 현상을 목격하며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구축한 페터 바이벨의 이번 전시가 관람객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대한 깊은 성찰의 순간을 제공하길 바란다." - 전시 리플릿 내용

 

 

 

 

 

이중섭 전시관에는 은지화작품이 있는데...

 

아마도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이중섭에게는 회화도구를 구입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한 열망을 담배 속지에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자료를 살펴보니..

 

부산 피난시절에 

" 한국전쟁당시 부산 피난시절 부두 막노동 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 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 나무위키 자료

 

생활고와 와병으로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이 생겨 친구 구상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였다." - 나무위키 자료

외로운 죽음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정신병,거식증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동묘지에 있다." - 나무위키 자료

 

 

 

 

"이중섭이 언제부터 은지화를 그렸는지에 대한 의견은 주변인의 회고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1952년 6월 가족을 일본에 떠나보낸 이후 시작해 1955년 열린 <이중섭 작품전 미도파백화점 화랑 1.18~1.27>까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섭은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검정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다. 그 결과 은박지 종이의 광택과 음각 선에 묻혀들어간 짙은 선이 흡사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작품 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 참여한 첫 출판미술은 1946년 원산문학가 동맹 기관지 [응향]의 표지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고, 1947년 오장환의 두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설화에 빗대어 그렸다. 1952년에는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화 밑그림을 제작하고, 이후 [자유예술]과 [문학예술] 등에 다수의 삽화를 남겼다. <새>는 1957년 9월호 [자유문학]표지로 쓰였다. "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의 회화/가족을 보고...

당시의 사회가  유교에서 부터 이어져 온 남성 권위주의 사회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들은 누구에게나 있었겠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은 드물고,  무심한 표현들이  뭇 남성들의 모습이었다면 ....

 

그와는 달리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에게 가족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존재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설명글을 보니 "가족과의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했다" 라고..

적혀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결혼후에 공산치하에서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 자료 나무위키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6.25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 - 자료 나무위키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 자료 나무위키

 

제주도에서 ..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가족과의 이별...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의 부고를 접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 자료 나무위키

 

이후에..

여러 노력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만나지 못한 가족들..

이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의 손을 놓고 싶지않은 마음을  서로  맞잡은 손과 이어진 끈으로 표현한 것 같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작품들이..나의  소중한 가족들을 생각나게 한다.. 

 

 

 

 

" 이중섭은 1950년 12월 피란 생활을 시작하며, 어머니와 이별하고, 1952년 6월 아내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은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중섭은 네 사람이 서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모습,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신, 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 등을 그리며 가족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 미술관 설명

 

 

 

 

 

 

 

" 이중섭이 아이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원산의 한 고아원에서 미술 교사일을 잠시 했을 때,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서로가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들 사이에 게와 물고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은 1949년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망월>에 새를 등장시킨 이래 1950년까지 새 또는 닭을 즐겨 그렸다. 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내는 동안 닭을 직접 기르면서 관찰하고, 그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두 마리의 닭을 부부로 의인화하거나, 새와 인간을 동등한 크기로 두어 가족 구성원으로 엮어내는 한편, 때로는 화면의 대각선으로 닭을 배치해 역동적인 형세로 표현해냈다" - 미술관 설명

 

 

"소는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뜻하는 상징이었다. 1940년대 초반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여러 작품에서도 소의 도상이 등장하고, 1940년 후반 원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유채로 그린 대표작들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 그려졌다" - 미술관 설명

 

 

 

 

이중섭1940년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림의 열정을 놓지않고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동화같은 작품으로 그려내어 우리들의 마음을 설래이게 하였고, 1950년대 비참했던 한국전쟁속에서도  그림의 열정을 놓지않았고 우직한 '소'를 그려내어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품을 남긴  최고의 화가이자, 국민들이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므로...

 

4월이지만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 이중섭에 다녀왔다.

 

이번 특별전은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님의 유족께서 기증한 미술작품 총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 90여점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10점  총 100여점으로 구성한 전시라고 한다.

 

이중 먼저 가장 많은 작품을 선보인 엽서화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엽서화작품 1940년~1943년까지 4년간의 작품이라고 하며..

특히 이 작품들은 도쿄 문화학원에서 만나 연인이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다수의 엽서(9x14cm)에 그린 작품들이고, 

이후 이중섭은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하였고,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엽서화를 보고 느낀점은!!!

소박한 작은 크기의 엽서에  인물, 동물, 생물 그리고 기하적인 이미지단순하게 그린 점인상적이었고, 단순한 색조이지만  생동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 모든 요소가 이중섭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

어떤 엽서화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동화와 같은 순수함을...

어떤 엽서화는 인물의 자유로운 동작의 이미지를 통해서 자유함을..

어떤 엽서화는  서양의 신화속의  동물들의 이미지를 넣은 듯한 서양화다움을...

그리고 어떤 엽서화는 동양화를 단순한 색깔과  재미있는 인물로 새로운 동양화를 느끼게 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천재 화가의 생각을 '엽서화'라는 작은 크기의 화폭다양한 정서를 담은 소박함이 좋았다 ...

 

ㅕㅂ

 

 

"이중섭은 1937년 일본 도쿄의 문화학원에 입학하고, 1939년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처음 만났다. 그는 후일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다수의 엽서를 보냈는데....9 x 14cm의 관제엽서 앞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는 주소를 남겼다.현재까지 남아있는 엽서화는 총 88점이며,이를 연도별로 구분하면 1940년 1점, 1941년에 75점, 1942년 9점 1943년에 보낸 것이 3점이다.이 그림들은 1979년 열린 <이중섭작품전> 미도파백화점 화랑 4.15~5.15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일본 유학시절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등과 함께 활동하던 자유미술가협회의 추상 및 초 현실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 미술관내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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