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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 국립중앙박물관

SYMon_Choi 2024. 12. 17. 15:53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과 협업하여 19세기말 비엔나를 중심으로 변화를 꿈꿔왔던 당시 예술가들의 모더니즘 작품 전시회가 있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당시 작가중  '키스' , '바우어의 초상' 등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 이외의 작가들은 생소하였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에곤 실레'의 작품을 보고, 여리고 마른 듯한 독특한 인물 모습, 칼러풀한 색감, 단숨에 과감한 선으로 그린 것 같은 크로키적 그 만의 작품 세상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람후 '에곤 실레'의 책도 한권 사서 전체 작품을 살펴보았는데 당시로는 볼 수 없었을 것같은 칼라풀한 색감의 인물화, 어두운 풍경화, 파격적인 누드화들이 역시 독특한 색감과 화풍의 작품들로 가득차 있어서,  이번 전시가 한정된 작품 전시임과 또 왜 당시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비엔나에서는 당시 보수적인 미술계의 엄격함에 반기를 들고, 젊은 예술인들이  '개혁'을 주제로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비엔나 분리파'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청년 작가들이 고전적인 교육과 화풍에서 벗어나 개혁을 품고 자신만의 새로운 시도로 작품 세상으로 나아간 이들 작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성이후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잡지를 만들고, 직접 표지를 만들고, 전담 갤러리에서 판매하고, 생활용품을 예술가들이 디자인하고 만들어서 일상에서도 예술가들의 영향력을 높였고, 그 결과 이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한 시대를 장악하고 풍미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예술가중 아쉽게도 스페인독감으로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에곤 실레'의  파격적인 누드 작품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워서 문제가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예술 작품으로만 본다면 탁월한 감각을 느끼게 합니다. 또 삶을 살펴보니 어려서 요절한 아버지, 서먹한 어머니와 관계, 삼촌의 밑에서 자라나는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고독, 방황, 욕망 등 인간의 불안한 감정이 독창적인 이미지와 칼러풀한 색감의 독특하고, 강렬하게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책을 통해서 보니 당시 어떤 후원자가 당시의 이들의 작품 약 1,000여점을 구매하며 지원해 주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이를 소유한 재단은 당 시대의 최고의 작품들로 현재까지 비엔나에서 영향력있는 재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예술인들의 개혁적인 작품들을 관대하게 바라보고, 문화적인 관심으로 지원한 많은 후원자들이 있음으로 비엔나의 모더니즘이 르네상스와 같이 꽃 피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대한민국의 최고의 전통시장 수유시장도 시대에 맞는 감각과 혁신으로, 전통을 넘어서는 개혁적인 전통시장으로 변모하길 기원해 봅니다.   

 
 

 

아래는 박물관 설명글 입니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배경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했던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보수적인 역사주의가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탐구했습니다. 이들의 도전과 실험은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실레까지, 자유를 꿈꾼 예술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클럽' 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한 충돌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활을 했습니다.
 
혁신의 상징
베토벤을 위한 전시회
 
비엔나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인 제체시온의 중앙 전시실에는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중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일부를 인간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으로 묘사한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실의 세 벽면에 그렸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비엔나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일부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전시회의 전체 디자인은 비엔나 분리파의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새롭고 대담한 전시회였다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급적인 시도를 어려워하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전시의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 했습니다.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류와 후원,
비엔나의 카페 문화
 
카페는 화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정치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습니다. 카페 문화는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중심이었으며,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데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이 시기 비엔나 예술가들은 활발한 예술 후원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카페는 후원자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재력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감사의 의미로 후원자의 드로잉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미술관 설명글 발췌

 

실레가 그린 제49회 비엔나분리파 전시회

 

그림의 맨위는 실레 그리고 맞은편에 비어있는 자리는 클림트의 자리라고 합니다.
에곤실레의 자신감이 보이는 포스터라고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예술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사소한 영역은 없다."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미술관 설명글 발췌

고양이를 안은 클림트
국립극장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 구스타프 클림트
벽화 확대이미지
하나지역의 소녀 - 구스타프 클림트
노인의 옆모습 - 구스타프 클림트
모자를 쓴 여인 -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속의 여인 - 구스타프 클림트
제1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페르디난트 안드리
제16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알프레드 롤러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알프레드 롤러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 루돌프 칼바흐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에른스트 에크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뒤쪽 의자에 앉은이 구스타프 클림트) - 모리츠 네어

 
'베토벤 전시회'라고도 불리는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개막하기 직전, 모리츠 네어가 찍은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의 단체 사진이라고 합니다. 네어는 개막을 준비하던 예술가들을 중앙 전시실로 모아 자세를 잡게 한 뒤 사진을 찍었고, 그는 자연스러운 사진 연출을 통해 인물의 개성을 담고자 했다고 합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활을 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봄'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하여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베르 사크롬(성스러운 봄)과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클로만 모저
'베르 사크롬 1호 - 창간호

 

표지 가운데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세 개의 상징적인 표지가 열매처럼 달려 있습니다. 이는 예술의 기본이 되는 세분야인 건축, 회화, 조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화분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와 라틴어 제목인'베르 사크룸' 즉 '성스러운 봄'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 비엔나 분리파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 박물관 잡지표지 설명글 발췌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5/6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9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 10호
'구스타트 클림프' 평전 - (작가 : 펠릭스 잘텐 / 디자인 : 베르톨트 뢰플러)

 
작가 펠릭스 잘텐은 혁신적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 경향을 옹호하는 책을 썼다. 클림트의 개인전에 맞춰 발간된 이 책에서 잘텐은 그를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자로 묘사했다. 그래픽 디자이너 베르톨프 뢰플러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표지를 디자인했다. 예술과 실용적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뢰플러는 이후 그래픽 디자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표지 중심부에 쓴 이름의 필체는 클림프의 서명을 흉내 낸 것이다    

- 박물관 표지 설명글 발췌

 

베토벤하우스 9호- 카롤 몰 (판화)

 

베토벤 하우스 10호 - 카롤 몰(판화)

 

벨베데레 궁전 - 카를 몰 (판화) -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 - 클로만 모저

 

황제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 - 클로만 모저
황제 레오폴트 2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 - 클로만 모저
카롤 6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 - 클로만 모저
큰 포플러 나무 II (다가오는 폭풍) -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휴가를 보낸 아터제 호수 근처 예배당 풍경을 그렸다. 우뚝 솟은 거대한 포플러 나무가 강한 인상을 준다. 다양한 색으로 점을 찍어 포플러 나무를 그렸는데, 한 평론가는 반짝이는 듯한 잎의 표현이 '송어의 비늘' 같다고 평했다 화면 가득 휘몰아치는 바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듯한 하늘을 표현해 긴장감이 감돈다. 클림트가 도시적인 인물화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포플러 나무 확대 이미지
호에 바르테의 겨울 - 카롤 몰
쇤브룬에서 - 카롤 몰
깊은 숲 - 안톤 파이슈타우어
언덕 아래의 마을 - 에곤 실레
가을 숲 - 에곤 실레
호숫가의 남녀 - 에른스트 슈퇴어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 -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
옥수수 짚이 있는풍경 확대이미지
비엔나 사교 살롱 사진 및 의자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해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해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실비아 콜러(화가의 딸) - 브론치아 콜러 피넬
여인의 초상 - 브론치아 콜러 피넬
손을 얼굴에 대고 있는 에리히 레데러(에곤 실레의 여섯살 어린 친구이자 제자)의 초상 - 에곤실레
프란츠 하우어의 초상 - 에곤 실레 (하우어는 비엔나의 유명숙박업소의 주인이자 미술품 수집가로, 레스토랑 숙박업소로 큰 돈을 벌어 당시 에곤실레등의 작품 1,000여점을 넘게 수집했고, 그의 수집품은 지금도 비엔나 예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파울 세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 오스카 코코슈카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 오스카 코코슈카

 

아돌프 로스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 오스카 코코슈카

 

 
콜로만 모저
 
"이제 대중은 '비엔나 분리파 스타일'을 원하게 될 것이다."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 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지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처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산맥 - 클로만 모저
칠엽수 꽃 - 콜로만 모저
마리골드 - 콜로만 모저
동굴 속의 비너스 - 클로만 모저
구름 습작 - 콜로만 모저
레장 (드 샤모세르산) - 콜로만 로저
레장 (르 샤모세르산) 확대이미지
깊은 숲('아베'를 위한 습작) - 알빈 에거 리엔츠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 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 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는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박물관 설명글 발췌
 

 

기도하는 소녀, 신성한 무덤, 부분 II - 알빈 에거 리엔츠
고향에서 영감을 얻은 풍경 노동자 - 알빈 에거 리엔츠
고향에서 영감을 얻은 풍경 (와츠탈 풍경) - 알빈 에거 리엔츠
점심식사('수프' 두 번째 그림) - 알빈 에거 리엔츠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요제프 호프만
 
"언젠가는 생필품도 예술가에게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갤러리에 있는 구스타프 피스코 - 무명의 사진작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프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 애곤 실레
국화 - 에곤 실레
소년과 큐피드 - 안톤 콜리히
와인잔을 앞에 둔 화가의 아내 - 안톤 파이슈타이어
여성의 초상 -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스페인 여인 - 한스 뵐러
조용한 여성 (화가의 어머니의 초상) - 안톤 콜리히
푸른옷을 입은 소녀 -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오스카 코코슈카
 
"내가 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답은 그림 그자체에 있다."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혐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소녀 - 오스카 코코슈카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 오스카 코코슈카
피에타 연극(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 오스카 코코슈카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 오스카 코코슈카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취리히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코코슈카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 오스카 코코슈카
양쪽에서 본 자화상 - 오스카 코코슈카
촛불 아래 두 사람_석판화 연작 '묶여있는 콜럼버스'를 위한 습작 - 오스카 코코슈카
여인의 얼굴 _석판화 연작'묶여있는 콜럼버스'를 위한 습작 - 오스카 코코슈카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 오스카 코코슈카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께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슈바르츠발트 부부의 아파트는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들 부부는 재정 후원과 더불어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헤르만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얼굴과 손을 가장 강조했다. 코코슈가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질감을 강조하거나 긁어내는 등 톡특한 기법으로 헤르만의 내면을 화폭에 표현했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 오스카 코코슈카

 

자화상 - 막스 오펜하이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초상 - 막스 오펜하이머
나무와 집이 있는 풍경 - 리하르트 게르스틀
트라운 호수와 '잠든 그리스 여인' 산 풍경 - 리하르트 게르스틀
발데마어 웅거의 초상 II - 리하르트 게르스틀

 

리하르트 게르스틀
 
"그의 초상화는 그림이 아니라 폭발이다!"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스마라가다 베르크 - 리하르트 게르스틀

 
상류층 집으롤 보이는 공간에 한 여인이 밝은 빛을 받으며 앉아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점으로 색을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해 공간을 표현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스마라그다 베르크이다.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알반 베르크, 아르놀트 쇤베르크 같은 음악가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음악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고, 격렬하고 힘 있는 붓질로 감정을 표현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스마라그다 베르그 확대이미지
헨리카콘의 초상 - 리하르트 게르스틀

 
이 작품은 당시 상류층 여성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표현법은 전통화법과 다르다. 붉은색과 파란색 점으로 헨리카가 앉은 소파를 표현했고, 거칠고 빠른 붓질로 피아니스트로서 열정을 품은 헨리카의 감정 상태를 나타냈다. 흰드레스의 파란색 윤곽선이 헨리카의 몸을 감싸며 고고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핸리카 콘의 초상 확대이미지
반신 누드의 자화상 - 리하르트 게르스틀

 

 
선의 파격
젊은 천재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표현했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소녀의 초상 - 에곤 실레
긴머리를 한 자화상 -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 에곤 실레

 

에곤 실레의 개성을 담은 사진 - 안톤요제프 트르치카

 
 

에곤 실레
 
"나는 썩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남길 열매가 될 것이다."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톡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 에곤 실레


실레는 이 작품에 '스스로를 보는 이' 또는 '죽음과 인간' 이라는 두 개의 제목을 붙였다.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고, 그 뒤로 두 번째 자아가 유령같이 그려져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유령이 인물의 어깨를 감싼다. 주인공은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자아에서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이 작품에서 시선이 집중되는 곳은 아래에서 뻣어 올라온 '손'이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손을 내면의 심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또한 어두운 색조와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의 고통과 불안함을 표현했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스스로를 보는 이 II(죽음과 인간) 확대이미지
손 - 이반메슈트로비치

 
예술가에게 '손'은 창작 활동에 꼭 필요한 요소다. 따라서 작품에 그려진 '손'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화가 감정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소재이다. 크로아티아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는 받침대 아래에서 손이 위로 튀어나오도록 표현했다. 그의 구부림과 각도가 다른 긴 손가락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묘사해 손에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시인 - 에곤 실레

 
밑그림이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튀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쌓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 색으로 그렸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시인 확대이미지

 

계시 -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을 그의 편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게시>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을 일평생 소비하여 살아갈 뿐이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더 이상 빛나지 못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됐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존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발하는 넘치도록 충분한 빛은 무릎 꿇은 작은 인물과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한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느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건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뒤틀린 자세의 누드 자화상 - 에곤 실레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 에곤 실레

 

상처입은 사람 - 안 슈투르트
상처입은 사람 - 얀 슈투르사

 
이 조각은 중심을 잃고 곧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은 순간을 묘사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양팔을 들어 올린 자세로 다리를 꼬고 발끝으로 서 있는 긴장된 순간이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몸이 빛을 섬세하게 반사해 상처 입은 인물의 연약함과 불안함을 드러낸다. 인물이 느끼는 극한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한 방식은 에곤 실레가 수많은 드로잉에서 보여 준 화풍과 비슷하다. 당시 친한 예술가들끼리 각자의 작품을 주고받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슈투르사와 실레 역시 서로 교류하며 작품을 교환했다.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남자의 반신 누드, 뒷모습 - 에곤 실레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첫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어머니와 아이 - 에곤 실레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젊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 박물과 작품 설명글 발췌

어머니와 아이 확대이미지, 사인
마리아와 두 아이 II - 에곤 실레
어머니와 두 아이 II - 에곤실라 확대이미지

 
어머니는 얼굴과 맨발을 제외한 몸 전체를 초록색천으로 가리고 있다. 어머니의 움푹 꺼진 눈과 입은 해골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누운 아이 역시 죽어 있는 듯하다. 실레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피에타>에 빗대어 이 작품을 그렸다. 어머니의 왼쪽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어린아이가 한 명 더 있다. 줄무니 옷의 다채로움은 순수함과 희망을 상징하지만, 얼굴에서는 절망감이 엿보인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였던 실레의 불안과 상실감, 그리고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 박물과 작품 설명글 발췌 
 

자화상 - 에곤 실레

 
에곤 실레가 자기 얼굴을 조각한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
 
 

쪼그리고 앉은 여인_눈이 먼 어머니를 위한 습작 - 에곤 실레
고개를 기울인 소녀(게르티 실레) 에곤 실레의 여동생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 에곤실레

 

에곤 실레가 생각한 이상적인 어머니, 그리고 친밀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보여 주는 작품
 

머리에 검은 리본을 단 소녀 - 에곤 실레
천을 두른 여인의 뒷모습 <개종II>의 부분 - 에곤 실레
애도하는 여성 - 에곤 실레
애도하는 여성 확대이미지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겨울 나무) -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풍경화 속 자연에 인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부여했다. 하늘에 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외롭고 고립된 연약함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강렬한 생명력도 전해진다.

- 박물관 그림 설명글 발췌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확대이미지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골고다 언덕 - 에곤 실레

 
얼핏 보면 에곤 실레가 살았던 노이랭바호 근처 들판을 그린 작품 같지만, 실레는 이 들판의 풍경을 빌려 골고다 언덕을 표현했다. 여러 요소를 활용해 자연을 종교적 숭배의 장소로 만들어, 실레의 초기작이지만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 준다. 십자가 옆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색색의 띠로 묘사된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어, 지는 석양과 함께 골고다 언덕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준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도나우강의 슈타인 마을 II - 에곤 실레
언덕 위의 집과 벽의 풍경 - 에곤 실레 (어머니 마리 실레의 고향인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 오늘날 체코 체스키 크룸고프지역을 그린 작품)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마을 IV) - 에곤 실레
작은 마을 III - 에곤 실레

 

작은 마을 III 확대 이미지
들판의 풍경 - 에곤 실레
들판의 풍경 에곤 실레 사인 확대이미지
판자 지붕 집 - 에곤 실레
쪼그리고 앉은 여성 - 에곤 실레

 

비애 - 에곤 실레
올라간 치마를 입고 누워있는 여성의 누드 - 에곤 실레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 에곤 실레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 에곤 실레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젊은 여성 - 에곤 실레
속옷, 재킷, 모자를 걸친 젊은 여인 - 에곤 실레
서 있는 두 여성 - 에곤 실레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드를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합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츨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곧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박물관 설명글 발췌

 
 

오른쪽에서 본 여성의 상반신 누드 - 구스타프 클림트
왼쪽에서 본, 다리를 올리고 있는 여성의 반신 누드 - 쿠스타프 클림트
서 있는 두 여성 누드, 팔을 든 왼쪽 여성 - 구스타프 클림트
폴디 - 에곤 실레

 

팔에 기대어 엎드린 누드 - 에곤 실레
팔이 올라간 여성의 누드 - 에곤 실레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실레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결국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의 감정이 반영된 걸까요?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결같아 보입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
 

누워있는 여성 - 에곤 실레

 
에곤 실레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를 위에서 내려다본 구도로 그렸다.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양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의 자세 때문에 몸의 형태가 대칭적으로 보인다.  1918년 실레는 포스터를 디자인했던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 이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로 그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해 오스트리아를 덮친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먼저 숨을 거두고. 3일 뒤인 10월31일 실레도 28세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서 있는 세 여성 - 에곤 실레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례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 박물관 작품 설명글 발췌 

서있는 세 여성 확대이미지

 

예술에서 자유를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 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고 개척했던 예술가들을 만나며 자신이 걸어갈 길을 꿈꿔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 박물관 설명글 발췌